서용순 작가 칼럼 7:매향은 추풍에 흩날리고

서용순 | 기사입력 2023/10/14 [12:00]

서용순 작가 칼럼 7:매향은 추풍에 흩날리고

서용순 | 입력 : 2023/10/14 [12:00]

▲ 서용순 작가 사진(사단법인 한아세안포럼 제공)     ©발행인

 

역사산책 7

 

매향(梅香)은 추풍(秋風)에 흩날리고

 

 

서용순(수필가, 이지출판사 대표)

 

 

 

 

누가 사랑을 두고 생사를 초월한다고 했는가. 열일곱 여린 꽃봉오리를 흔들어 깨운 그 사랑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서른여덟 되는 해 여름 한바탕 매우(梅雨)에 떠밀려 스러질 때까지 죽음보다 더한 그리움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던 시인 매창(梅窓). 나는 지금 부안(扶安) 매창공원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 서 있다.

이른 아침 서울을 떠나 부안에 도착하자마자 고소한 백합죽으로 시장기를 달랬다. 그리고 소주 한 병을 사 들고 서둘러 그를 찾아갔다. 정갈한 공원에는 맑은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마침 그림을 그리러 나온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왔다.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

주인의 손을 맞잡듯 비석을 어루만져 본다. 세월의 흔적이 돌꽃으로 활짝 피어 있다. 가슴이 아릿하다. 소주를 꺼내어 종이컵에 따라 주인에게 먼저 권하고, 다시 한 잔을 따라 내 입안에 털어 넣었다. 쌉싸래한 소주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되레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의 무덤을 품에 안듯 에워싸고 있는 시비(詩碑)를 돌아보며, 나는 4백여 년 전 사람 매창을 만났다.

 

매창이 태어나던 날 그의 집 지붕 위에 백학(白鶴)이 찾아와 노닐었다 한다. 신분의 차별이 엄연하던 그 시절, 부안 아전과 관비의 딸로 태어난 매창의 앞길에 무슨 운명이 예비되어 있었던 것일까.

태어난 지 석 달도 안 되어 어미를 잃은 딸을 아버지 이양종은 교방(敎坊) 옆 의원 집에 맡겨 길렀다. 걸음마를 떼면서 약방과 교방을 무시로 드나들던 매창은 거기서 글을 배우고 거문고까지 익히게 되었다. 동네 아낙들의 젖을 얻어먹고 자란 가련한 처지였지만, 특히 한시와 가무에 뛰어나 주위의 칭찬을 들으며 자랐다.

그런 매창이 열다섯 살에 동기(童妓)가 되었다. 그때부터 얼굴에 지분을 바르고 사또의 부름을 기다려야 했던 매창. 마침내 고대하지 않았던 날이 오고야 말았다. 별관 객사로 매창을 불러낸 사또는 두강주(杜康酒)를 몇 잔 거푸 마셔대더니 눈초리가 이상해졌다. 그때 매창이 시 한 수를 읊었다. 그러자 사또는 반쯤 뉘었던 몸을 똑바로 세웠다. 어린 매창의 시에 정곡을 찔렸던 것이다. 이후 사또는 선정을 베풀기 시작했고, 매창을 속량(贖良)해 주기까지 했다.

 

자유의 몸이 된 매창은 상화방(賞花坊)을 차려 놓고 다락에 올라가 거문고를 탔다. 사람들이 하나둘 기웃거리기 시작하던 어느 날, 열일곱 매창의 가슴에 불을 지른 사람이 나타났다. 진사 서우관(徐雨觀). 하지만 그는 매창에게 한 개 봉화로 다가왔다가 가슴에 구멍만 남겨 놓고 떠나 버렸다. 그 후 매창은 머리에 쪽을 지어 비녀를 꽂았다.

밤마다 단장사(斷腸詞)를 지어 부르던 매창은 임을 찾아 서울로 향했다. 그런데 수소문 끝에 겨우 만난 첫사랑은 당파싸움과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이제 어찌해야 할까. 매창은 한강에 나가 몇 번이나 빠져 죽으려 했으나, 정말 질긴 것이 목숨줄인 모양이었다.

 

애끊는 정 말로는 할 길이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반 남아 세었고나

생각는 정 그대도 알고프거든

가락지도 안 맞는 여읜 손 보소

 

매창은 다시 부안으로 돌아와 옛집을 정리하여 문을 열었다. 풍월과 탄금 솜씨는 더 기가 막혔다.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랴. 당대의 대시인이요 천하의 풍류객인 유희경(劉希慶)이 매창의 집에 나타났으니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진즉 그의 명성을 듣고 사모해 오던 매창은 유희경을 보자마자 흠뻑 빠져 버렸다. 유희경 역시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오십이 가깝도록 이렇다 할 염문을 뿌린 적이 없는 그가 스물여덟 연하의 매창 앞에서 맥을 못추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인연도 길지는 못했다. 임진년(1592) , 불길한 소식이 전해졌다. 왜병들이 쳐들어와 내륙을 향해 물밀듯이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깜짝 놀란 유희경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서울로 옮겨야 했다. 매창은 또다시 입술을 깨물었다. 문을 닫아걸고 실컷 눈물을 쏟아냈다. 한세상 태어나서 함께하지 못함은 참으로 얄궂은 운명일 수밖에 없었다.

매창은 문풍지만 가늘게 떨어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뻥 뚫린 가슴으로 들락거리는 찬바람은 피를 말렸다. 열아홉에 절정기를 맞았던 매창의 봄은 그 후 내내 고통을 더할 뿐이었다. 사랑, 그것은 슬픔의 끝을 달리는 형벌인가.

 

감감무소식인 유희경을 기다리던 매창은 스물여덟이 되었다. 기방에선 환갑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 매창의 진가는 퇴색되지 않았다. 그 무렵 제일의 문장가요 호걸인 허균(許筠)이 찾아왔다. 그는 호탕한 성격대로 급격한 개혁을 부르짖다가 관직에서 여러 번 쫓겨났으나, 매우 총명하여 날카로운 지성으로 현실을 깨뜨려 보겠다는 집념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것이 훗날 변산반도를 무대로 한 <홍길동전>이다.

매창은 허균을 붙들었다. 두 사람은 대화의 상대로서 그 누구보다도 의기투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창이 유희경을 배반하고 허균과 가깝게 지낸다는 소문이 퍼졌다. 매창은 억울했지만 변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를 시험하거나 상대를 욕되게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10년 가까이 시주(詩酒)를 나누며 사귈 수 있었던 것이리라.

매창의 몸은 나날이 쇠약해졌다. 그럴수록 지난날이 뼈저리게 그리웠다. 첫사랑 서우관과 연인으로 사모해 마지않던 유희경, 그리고 진실한 우정을 나눈 친구 허균. 그는 사랑을 통해 생의 짧음과 무상함을 알았고, 기쁨과 고통을 함께 느꼈으며, 감동과 자유를 터득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아무도 매창의 곁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렇게 쓸쓸히 생을 마감한 매창에게, 그래도 사랑은 생사를 뛰어넘는 것인지 묻고 싶어진다.

 

아직 내 잔등 위에 따사로운 햇살이 힘차게 박혀 있다. 매창의 부음을 듣고 지은 허균의 시(아름다운 글귀는)를 지나, 뒷날 그의 무덤을 찾아와서 애끓는 심정을 노래한 유희경의 시(매창을 생각하며)를 읽는다. 가람 이병기는 <매창뜸>으로, 김민성 전 부안문화원장은 <매창 묘에서>라는 시로 후세 시인 묵객들의 영원한 연인 매창을 노래했다.

매창의 애절한 심정을 담은 시가 눈앞을 흐리게 한다. 제도적으로 불합리한 인습과 어쩔 수 없이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매창. 그는 인내와 관용으로 그것들을 이겨내고, 또 순수한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으며, 주옥같은 시문 수백 수를 남겨 그 향기가 지금도 전해져 오고 있다.

나는 오래되어 굳어 버린 먼지를 털어내듯 바람을 마주하고 섰다. 멀리 추수 끝난 벌판에 허수아비가 팔을 벌리고 서 있다. 뭐든 다 받아들일 수 있다는 표정이다. 나도 저 허수아비처럼 무욕의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또 매창처럼 미치도록 사랑할 수 있었으면 더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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