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순 작가 칼럼 2: "역사 산책 2"-부용상사곡

서용순 | 기사입력 2023/04/16 [11:07]

서용순 작가 칼럼 2: "역사 산책 2"-부용상사곡

서용순 | 입력 : 2023/04/16 [11:07]

▲서용순 작가 사진(사단법인 한아세안포럼 제공) ©발행인

 

역사산책 2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

 

 

서용순(수필가. 이지출판 대표)

 

 

 

유월의 산은 밤꽃 냄새로 가득하다. 가파른 산길을 올라 작고 정갈한 무덤 앞에 이르니 시인운초김부용지묘(詩人雲楚金芙蓉之墓)’라 새긴 묘비석이 나그네를 맞아 준다. 그 옆에 담홍색 패랭이꽃이 수줍게 피어 있다. 마치 열아홉 나이에 칠십 노인을 사모한 부용을 보는 것 같다.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운명적인 사랑을 아름다운 시로 승화시킨 부용. 그 시향(詩香)이 지금도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 있으니, 한번 부용의 연시(戀詩)에 취해 보고 싶다.

 

가난한 선비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부용은 네 살 때 글을 배우고 열 살 때 당시(唐詩)와 사서삼경을 외웠다 한다. 그러나 부모를 일찍 여의고 줄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퇴기의 수양딸로 들어간 것이 부용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어렸을 적부터 총명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부용이 기생의 길을 걷게 된 것은 가혹한 운명을 탓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부모에게 물려받은 것은 가난과 총명뿐이요, 또 노류장화의 그늘 아래 의지하게 되었으니 기적(妓籍)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열두 살에 평안도 성천(成川) 관기가 된 부용은 시문과 노래와 춤에 뛰어나고 얼굴도 고와서 금방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내로라하는 풍류객들이 부용을 만나고 싶어 애간장을 태우고, 수령들은 부용만을 끼고도니 동기들의 시샘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여인들의 시샘은 오뉴월에도 서릿발을 내리게 한다지 않던가. 이 지경이 되면 겉으로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어 보이고 속으로는 우쭐해서 천하의 명기임을 자부할 만도 한데, 어쩐지 부용은 자신의 처지가 외롭고 서럽기만 하였다.

 

밤들어 인적 없고 물소리 낮은 것을

서산에 달이 지고 하늘엔 바람이라

이 맘은 헤매는 구름 어딜 갈까 하노라

 

세월은 가만히 있어도 흐르고, 바삐 살면 더 빨리 흘러가는 것. 어느새 부용의 나이 열아홉이 되었다. 그때 부용의 운명을 다시 바꿔 놓은 신임 사또가 부임해 왔다. 그는 정사에만 힘을 쏟는 명관이었으나 부용의 용모와 재주를 어여삐 여기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직속상관인 평양 감사 김이양(金履陽)에게 부임 인사를 하러 가면서 부용을 데리고 갔다. 신임 사또와 감사 두 사람은 사제지간이었으므로 김이양은 제자를 위해 대동강 연광정에서 환영 연회를 베풀었다. 이때 부용은 김이양을 처음 만났는데, 그의 나이 일흔일곱이었다.

김이양은 안동(安東) 김문(金門)으로 함경도 관찰사, 이조·병조·호조판서, 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인물이다. 풍채가 뛰어나고 성품이 너그러우며 시문에 능하여 부용은 이미 그의 소문을 듣고 있었다. 그런 그를 가까이 대하게 되니 부용은 흠모의 정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다 평양에 머물면서 김 대감을 돌봐 드리라는 신임 사또의 명을 받으니 뛸 듯이 기뻤다. 그러나 김이양은 점잖게 거절했다. 그렇다고 그냥 물러날 부용이 아니었다.

뜻이 같고 마음이 통한다면 연세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세상에는 삼십객 노인이 있는 반면 팔십객 청춘도 있는 법이옵니다.”

이런 말을 듣고 감동하지 않을 팔십객이 있다면 그는 팔불출일 것이다. 김이양도 자신의 나이를 생각하여 사양했지만 총명하고 아름다운 부용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부용 또한 연만한 대감을 공양하는 데 정성을 다하였다.

두 사람은 남녀간의 열병 같은 사랑은 아닐지라도 신뢰와 존경으로 대하면서 서로의 마음을 시문으로 화답하며 지냈다. 부용에게 김이양과의 만남은 생활면이나 정신세계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타고난 시적 재능을 더욱 고양시키는 데 더할 수 없이 중요한 기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관직에 매인 김이양이 호조판서에 제수되어 한양으로 가게 되었다. 부용은 또 어쩔 수 없이 홀로 남게 되었다. 열 살 때 부모를 여의고 의지가지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보다 더 처량했다. 그런 부용을 김이양이 기적(妓籍)에서 빼내어 양인의 신분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정식 부실(副室)로 삼아 훗날을 기약하고는 한양으로 떠나 버렸다.

그런데 호조판서의 직책이 막중했던지 해를 넘기고 시절이 바뀌어도 한양에서는 소식이 감감하였다. 재회의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부용은 뜬눈으로 밤을 새우는 날이 잦았다. 문풍지만 떨려도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젖히는 부용. 그리움의 아픔을 견뎌 내는 부용의 모습이 눈물겹다. 마음과 마음을 합하면 하늘 끝이라도 날아갈 줄 알았는데 마음과 마음을 합쳐서 고통의 씨앗만 뿌려 놓은 셈이었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부용은 피를 토하듯 시를 써서 김이양에게 보냈다. 이 시가 부용이 남긴 아름다운 보탑시(寶塔詩)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이다. 너무 길어서 전문을 다 싣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路遠

信遲

念在彼

身留玆

紗巾有淚

雁書無期

(중략)

 

欲忘難忘强登浮碧樓可惜紅顔老

(중략)

 

三時出門望出門望悲哉賤妾苦懷果何其

惟願寬仁大丈夫決意渡江舊緣燭下欣相對

勿使軟弱兒女子含淚歸泉哀魂月中泣相隨

 

이별하옵니다

그립습니다

길은 멀고 글월은 더디옵니다

생각은 님께 있으나 몸은 이곳에 머뭅니다

비단 수건은 눈물에 젖었건만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

(중략)

 

잊고자 해도 잊기가 어려워 억지로 부벽루에 오르니

안타깝게도 홍안만 늙어 가고

(중략)

 

삼시에 문을 나가 멀리 바라보니

애처로운 천첩의 심정은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오직 바라옵건대 관인하신 대장부께서 강을 건너오셔서

구연의 촛불 아래 흔연히 대해 주시고

연약한 아녀자가 슬픔을 머금고 황천객이 되어

외로운 혼이 달 가운데서 길이 울지 않게 해 주옵소서

 

여자의 일생이 참으로 무상하여 부용은 죽음을 따르고 싶은 심정이 간절하였으나, 그것도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사내들의 애간장을 뜨겁게 녹이던 꽃 같던 얼굴도 온데간데없었다. 부용의 사랑이 참으로 애처롭기만 한데, 총명한 부용은 연모의 정을 삭이고 삭여 시문으로 승화시켜 나갔다.

부용의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닿았던지, 김이양이 남산 중턱에 집을 마련해 놓고 부용을 불렀다. 마침내 녹천당(祿泉堂)의 주인이 된 부용은 김이양을 그림자처럼 보필하며 당시의 명사들과 자주 자리를 함께했다. 그들은 부용의 시재(詩才)에 감복하여 雲楚校書’, ‘雲楚女史등의 존칭으로 경의를 표했다. 부용 또한 자신을 문사(文士)로 인정해 주는 지인들에 의해 남녀차별, 신분제약이라는 사회적 질곡을 뛰어넘어 자신의 시 세계를 확장시켜 나갔다.

김이양은 여든세 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나라에서 봉조하(奉朝賀)’라는 벼슬을 내렸다. 이 벼슬은 종신토록 품격에 해당하는 녹을 받고 국가 의식이 있을 때는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하는 특별 예우직이다. 그가 과거에 급제한 지 60년이 되는 여든아홉 살에 회방(回榜) 잔치가 열렸다. 그때 김이양은 부용을 데리고 천안에 있는 조상의 묘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깊은 인연을 맺은 지 15년이 되는 1845년 이른 봄, 김이양은 아흔두 살의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용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는데, 이때 부용의 나이 서른넷이었다. 존경하고 사모하는 임을 잃자 부용은 방안에 제단을 모시고 밤낮으로 고인의 명복을 빌며 애통한 심정을 시로 달랬다.

 

풍류와 기개는 호산(湖山)의 주인

경술(經術)과 문장(文章)은 재상(宰相)의 기틀

십오 년 정든 님 오늘의 눈물

끊어진 우리 인연 누가 다시 이어줄꼬

 

그후 부용은 오로지 고인만을 그리워하며 16년을 더 살았다. 임종이 다가오자 내가 죽거든 대감마님이 있는 천안 태화산 기슭에 묻어 주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지금 부용은 소원대로 천안의 태화산 산마루에 김 대감과 가까이 정갈한 무덤으로 남아 있다. 그의 무덤 앞에 서서 생전에 그가 피를 토하듯 쓴 연시를 읊조려 보았다. 사랑의 유혹만큼 달콤한 밤꽃 향기가 숨을 막히게 했다.

19세기 초엽 평안도 성천과 한양을 넘나들며 당대의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신분의 귀천과 사회적 질곡을 뛰어넘어 견고한 자신의 세계를 지향한 시인 운초 김부용. 그의 결곡한 모습이 아름답다. 이것이 그가 송도의 황진이, 부안의 매창과 더불어 조선 시대 3대 시기(詩妓)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까닭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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